그 당시 드래곤 라자로 시작해 통신에 떠다니는 판타지 소설들과, 난생 처음으로 RPG라는 장르를 접하게 한 파이널 판타지5에 심취해 있던 나는 의외로 빠른 속도로 판타지 소설들의 패턴화에 실망을 하고 있었다. 질려갔다고 하는 표현도 좋겠지.
그런데 우연찮게 놀라운 줄거리(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지만)를 만나게 됐다. '자아'를 찾는 주인공의 모험이 주제인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 짧은 줄거리 축에도 못 끼는 소식을 접한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료가 되어 버렸고 그 소설을 찾기 위해 나름 애쓰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름은 어슐러 K. 르 귄. 그리고 그 소설의 제목은 '어스시의 마법사'였다.
DMC-FZ10 | Manual | 1/30sec | F/2.8 | 8.5mm | ISO-200 | Off Compulsory
구 양장본 '어스시의 마법사'. 최근엔 훨씬 고품격있게 출판되고 있다.
실제로 책을 구하기 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는데, 유난히 외국산 판타지 소설에 짜디 짠 국내 출판 업계 속성 상, 책 구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어스시 시리즈 중 세 권을 구하는데 몇 년이 걸렸고 그나마도 후속편이 나오리라는 보장조차 없었다.
그런데 최근 옆 나라에서 이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시사회가 있었나 본데, 그 결과는 참담하기만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 감독했다는 그 애니메이션의 시사회에서 하야오는 정작 상영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중간에 나왔다는 말도 있고, 그 작품을 본 사람들 중엔 '수출하면 국제 망신'이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그 몇몇 사람들의 바램과 달리 '게드 전기'라는 이상한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지브리 스튜디오 제작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한국으로의 수출이 급속도로 진전되고 말았다.
어지간히 영상물과 인연이 없는 어스시 시리즈는 이번에도 그 악몽을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내게는 원작을 훌륭하게 망쳐버린 그 애니메이션은 별로 관계 없다.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왜냐하면, 어스시 시리즈의 재 출판에 힘을 실어준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정말 보고 싶던 시리즈의 최종편, '테하누'도 출판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어스시 시리즈에 만큼은 객관적일 수 없을 만큼 푹 빠져있다. 이른바, '어스시 빠'랄까 :)
DMC-FZ10 | Manual | 1/40sec | F/2.8 | 23.5mm | ISO-200 | Off Compulsory
시리즈 4편 중, 최종편. '테하누'
이전보다 상당히 개선된 디자인의 표지와 종이 질을 갖고 다시 태어난 어스시 시리즈는 이제야 말로 '세계 3대 판타지' 중의 하나에 걸맞는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참고로 세계 3대 판타지 중 나머지 두 개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이다(해리 포터는 이 축에 끼지도 못한다-_-).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이전 번역물과 같은 출판사에서, 그것도 같은 번역인들이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전 책과의 괴리감은 거의 없다. 주요 인물 중, '테나르'의 이름이 '테나'로 바뀌어 나온 것 빼고는 모두 동일하게 되어있다. 덕분에 전 권을 새로 사지 않아도 되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 황금가지 홈페이지에 가봤는데, 마침 구판 어스시 1~3권을 신판으로 교환해주는 이벤트가 시작됐다. 응모는 했는데 대답이 어찌 돌아올 지 모르겠네...^^)
DMC-FZ10 | Manual | 1/30sec | F/2.8 | 10.4mm | ISO-200 | Off Compulsory
개선된 디자인. 종이질이 좋아지면서 책도 두 배 두꺼워졌다.
3권에서 왕을 키워낸 대현자이자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게드보다도 2권에서 게드가 아투안의 무덤에서 구해온 여인, '테나'에 초점이 맞춰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젊은 판타지 소설들과 달리 나이가 든 여인과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반신이 일그러진 소녀, 힘을 잃은 늙은 남자가 주역을 맏고 있지만 이야기의 힘은 잘 살아있다. 특히 그 동안의 시리즈 특징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의 마지막 까지 가서야 반전을 일으키는 스토리는 여전히 맛깔스럽고 박력있으며 감동이 담겨있다.
일반 판타지들과 달리 얌전하게 진행되는 편인 시리즈인데 최종편은 그 시리즈들 중에서도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그 세계를 사는 평범한 인간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작은 사건들에 불과하지만, 끝에는 거대한 기적을 일으킨다.
DMC-FZ10 | Manual | 1/50sec | F/2.8 | 12.1mm | ISO-200 | Off Compulsory
앞, 뒤표지 안쪽에 있던 지도는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성장과 자아를 무엇보다도 높은 가치로 가진 이 소설은 성장기의 청소년은 물론이고 다 자란 성인도 읽을 만 하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소설이고, 다른 세계 3대 판타지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 읽는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는 이미 읽어 본 사람이 많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도 이 어스시 시리즈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DMC-FZ10 | Manual | 1/80sec | F/2.8 | 20.1mm | ISO-200 | Off Compulsory
어스시 시리즈의 리스트. 단편집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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