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분명히 디지털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특유의 느낌 - 최신, 새 것, 차가움, 삭제와 복사가 쉬운 가벼움 - 등으로 감성을 자극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혹시나 지금부터 100여 년이 지난 미래에서 본다면 지금의 디지털 기반 전자제품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킬 지도 모르지.

하지만, 초고속으로 말해지는 현 세대를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흙밭을 가까이서 볼 수 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이로서 내가 느끼는 아련함이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것에서 남아있는 것 같다.

연필의 나무 내음과 흑연의 감촉. 그리고 종이의 부드러움과 공책의 무게를 짊어지고 연탄의 온기와 얼어붙은 논밭의 단단한 얼음을 밟으며 살던 시절의 무의식이 겨우 20대 중반인 내게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건 왜 일까? 아마도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시대가 너무나도 초고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고속이기 때문에 많은 것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빠르게 사라지고 온정과 감정을 느끼기 전에 싫증을 먼저 느끼며 더 나은 새 제품을 찾게 되는, 정신조차 차리기 어려운 재빠른 회전 속에서 살게 된 것이 이유인지도 모른다.

속도가 곧 힘이고 능력이 되는 지금 시대에 역행하듯이 시간이 오래 걸리며 오래도록 남는 아날로그적인 기록은 효율성의 뒤떨어짐을 떠나서 그 기록 자체가 갖는 시간에 대해 초연한 태도가 괜스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좋은 말로 얼리어답터라는 별명을 가진 내가 어떻게든 하나 이상은 아날로그적인 기록 매체를 소지하려고 했던 건 아마 무의식 중에 시간을 붙잡아 놓으려는 갈등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노트를 사 보기도 하고, 때론 필름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기도 하며 이따금 연필을 손에 들어보기도 한다. 하다 못해 컴퓨터 바탕화면도 메모지를 흩뿌려놓는 식으로 꾸미는데, 그 자체가 이미 아날로그적인 발상의 메모지 활용법이 아닐까.
또한 블로그야말로 철저하게 디지털 위에서 발생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결집체이다. 기가헤르츠 단위로 움직이는 전자가 돌아다니는 서버 위에서 복잡한 웹 프로그래밍 언어에 의해 구현되고 데이터베이스에 데이터가 기록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떻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고 댓글이나 트랙백, 메타 블로그 등을 통해 사람과의 만남을 꾀하는 아날로그적인 내음이 가득한 것이 바로 블로그라고 생각한다.

10년치 일정을 기록할 수 있는 다이어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만약, 10년 뒤에 기록을 모두 채우고 그 다이어리를 돌아본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일에 근사함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되자, 뭔지 모를 서운함이 남는다.

빠르고 간편함. 느리고 아련함.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모두 소중한 감정이다. 그런데 유독 요즘은 아련함을 찾고 싶은 느낌이 많이 든다. 모 소설의 말처럼 마법의 가을이라도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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