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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d

1987, 그리고 나

RUKXER 2018.01.09 20:12

1987년이라고 하면, 1년 뒤엔 서울 올림픽이 열리고 불과 5년 뒤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는 시기.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 아니, 당시의 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이다. 비록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유복하게 잘 지내는 시기였다. 별 다른 걱정도, 고민도 없고 오로지 가족과 친구들과 네 발 자전거와 동네 놀이터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아이가 밝게 자라던 때였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쪽에서는 주먹을 쥐고 소리치다가 피를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각종 고문과 매질, 최루탄을 쏘는 자들도 있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가지의 세상이 하나의 나라에서 동시에 존재했다는 걸 꺠달은 것은 시간이 한참을 더 흐른 뒤였다.

1987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무리 어렸어도 그 때의 내가 아예 인지조차 못하던 이유가 뭘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아무래도 80년대 만 하더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언론 통제가 원활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 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데, 아마도 교육 시스템의 역할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스승의 날은 아이들의 손을 통해 갖다 바친 촌지 성격의 각종 선물들을 선생들이 교실에 쌓아 놓고 서로 자랑을 하던 날이며, 각종 행사나 소풍은 부모들에게 그저 아이들이 즐겁게 야외활동을 하는 날인 것 만은 아니라 부담스러운 날이었던 시기가 내 국민학교 시절인 것이다. 공직자로서 막강한 공권력의 일부에 속한 선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하루 종일 맡긴 부모들로서는 그들이 만든 불합리한 시스템에 그대로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어린 학생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언행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수업시간에 모두가 지켜 보는 앞에 세워 놓고 두꺼운 책들을 양손으로 마구 집어 던지며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해도 그 선생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던 시기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나는 요즘 '교권이 무너진다'는 말이 반 정도는 와 닿지 않는다. 그들의 말하는 교권이라는 것에는 촌지 뇌물과 스트레스 해소성 매질이 가능했던 '그들 만의 추억'이 조금은 포함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말이 조금 돌아갔지만..... 여튼,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듯이 훌륭하신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단체생활의 통제에 순응할 것을 적극 가르치던 그 시기의 국민학교들. 그 정도의 통제력을 가졌던 교육 시스템이라면, 1987년의 거대한 희생과 슬픔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도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왜곡하고 제어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그 날들을 너무나도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으며, 그 덕분인지 잘 살아 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한참 어린 나이에 이미, 불합리함을 맞닥들여도 그것에 숨죽이고 순응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던 사람 중 하나였다. 

영화 1987을 보면서 흐느낀 눈물 중의 절반 이상은, 나는, 온 몸을 던져 저항하고 희생하여 실제로 죽어갔던 저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히 감동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 때문인 것만 같다. 그것은 후회도, 감사도, 사과도 할 수 없어서 오갈 곳을 찾지 못하는 기이한 상실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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