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my word

RIP Ursula K. Le Guin

RUKXER 2018.01.24 20:53

어슐러 K. 르 귄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 번역문

by 제럴드 조너스(번역: 장성주)


아침부터 정신이 멍해지는 소식을 접했다. 작가, 어슐러 K. 르귄이 향년 88세로 타계하였다는 뉴스였다. 가짜 뉴스이길 바라면서 정정기사가 올라 올 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었지만, 끝내 사실이었다. 너무나도 슬퍼서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어슐러의 이야기를 처음 만난 것은, 우습지만 책이 아니었다. 인터넷도 보급되기 이전, PC통신 나우누리를 통해 외국의 어느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 있는데, 그것의 줄거리는 이렇다 -라는 게시물을 접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판타지 소설이 꽤 활발히 대량 생산되던 시절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서양 무협'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이에 염증을 느낀 독자들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그 게시물에서 본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신선했다. 자신의 실수로 만들어낸 그림자 괴물을 쫓는 마법사의 위대한 여정은, 그 끝에서 그림자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며 내면으로 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내용이었다. 나의 과오로 만들어진 것조차도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동양적인 성찰을 서양 작가가 너무나도 세련되고 멋지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선하다'라고 생각했던 그 소설이 오히려 수십 년 전에 쓰인 글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그것이 어슐러 K. 르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스시의 마법사'였다. 단지 게시물 한 페이지짜리 줄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판타지 소설에 대한 나의 눈높이가 너무 낮았다는 걸 깨닫게 해 줬고, 작가를 꿈꾸던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당시 또레들에 비해 나름 상상력이 좋고 글을 잘 쓴다고 자부했던 나의 부끄러울 정도로 얄팍한 수준이 안에서부터 발가벗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훌륭한 소설을 꼭 정독해야겠다 -그런 절박한 욕망이 강하게 솟구쳐 올라왔었다.

그렇지만, 어스시 시리즈를 출판된 책으로 접할 수 있던 건 그로부터 몇 년이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나마도 너무 빨리 절판되어 제대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계 3대 판타지로 일컬어지는 작품들 중, 유일하게 멀티미디어와 좋은 인연이 없는 어스시 시리즈는 그 때문에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출판과 배급도 소극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 바라 마지않던 책을 드디어 접하고 읽기 시작한 그때의 느낌이란.... 표현하기 힘든 감격이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 직장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수많은 내적/외적 갈등을 넘나들면서도 어스시의 이야기에서 얻은 '진정한 나'에 대한 개념은 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줬다. 마음이 많이 혼란할 때 휩쓸리지 않고 자주적인 판단을 시도라도 해 볼 수 있게 해 준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아직은 어린 딸아이가 이 책을 이해할 만큼 자라면 꼭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그야말로 내게는 인생의 책 한 권인 셈이다.

그러한 글을 쓴 위대한 작가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 판타지, SF 장르의 문학 전체로서도 큰 상실이지만, 개인적으로도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세에서는 작가 본인께서 만들었던 아름다운 세계들과 같은 곳에서 평안히 지내시길.


덧) 본문에서는 '어스시의 마법사'만 언급했지만, '로캐넌의 세계'와 '하늘의 물레'도 손에 꼽는 좋아하는 작품이다. SF 소설이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분들께 적극 추천 :-)


'my w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옵터 다이얼을 돌린다는 의미  (0) 2018.02.11
RIP Ursula K. Le Guin  (0) 2018.01.24
1987, 그리고 나  (0) 2018.01.09
시작한 것을 끝낼 줄 아는 새해가 되길  (0) 2018.01.01
댓글
공지사항
Total
83,950
Today
3
Yesterday
206
DNS server, DNS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