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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d

커피와 아버지

RUKXER 2018.02.22 13:39

이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염색하지 않으시게 된 아버지는 조막만 한 손녀를 그렇게나 사랑하신다. 이러저러한 사유로 우리를 찾아오시거나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게끔 하시는데, 그런 건 다 핑계고 그저 손녀딸의 오물조물하는 재롱을 보시고 싶으신 것이 티가 난다. 사실 상 경제활동에서 은퇴를 하시고 적적할 수밖에 없는 연세에 손녀만 한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게 더 있기야 하겠나 마는.

그러던 아버지에게 한 가지 관심거리가 생기셨다. 바로, 커피다.

아버지 세대의 어르신들이 대게 그러듯, 커피는 가장 저렴한 기호음료였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식당 출입구에 놓인 자판기 커피, 봉지를 뜯으면 프리마와 설탕이 같이 쏟아지던 믹스 봉다리 커피 등등으로 각인되다시피 한 수준에 불과했다. 원두커피는 정말 어쩌다가 호텔에 있는 카페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고 하시더라. 그러던 커피가 어느새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중심으로 변경이 되고, 가격은 10배 이상 뛰어올랐다. 낯선 메뉴 이름과 수많은 가지 수는 체감 가격을 더욱 상승시켰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아버지는 커피전문점에 가는 건 상상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곤 계속 믹스 커피를 타서 드셔 왔다. 당뇨에 대한 걱정으로 설탕을 덜어내는 것 외엔 변함없이 저렴한 커피를 찾으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변화의 계기를 하나 억지로 드려봤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근처 필립스 매장에서 할인하고 있던 커피메이커 머신을 안겨 드린 것이었다. 갈려진 원두를 필터에 넣고 물탱크에 물을 채운 뒤 전원을 켜기만 하면 되는 간단하고 전형적인 커피메이커였다. 내 어린 시절에도 집안 어딘가에 있던 그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질 좋고 신선한 커피 원두를 구하는 게 어려워서 많이 사용되지 않았고, 이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없어지기도 했다. 그 경험 때문인지 아버지는 한동안 새로 마련해드린 커피메이커를 잘 사용하지 않으셨다.

나는 커피전문점에서 원두를 사 드시는 걸 권해 드렸다. 부모님께서 자주 오가시는 길 근처에는 당연한 듯이 커피전문점들이 빼곡했고, 그 매장들 모두가 커피 원두를 취급하고 있었다. 대충 에스프레소와 드립커피 중간 수준으로 갈아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고 말씀드렸고, 그러고 나서도 몇 주일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한 번 시도를 해 보셨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눈을 번쩍 뜨게 되셨다고나 할까. "얼마 전만 해도 잘 먹던 맥심이나 카누를 이젠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 고 종종 말씀하신다.

요새 아버지는 몇 걸음이나 더 나아가셨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그라인더도 마련하셔서 직접 갈아 드신다. 매장에서 갈아 온 커피는 향이 빨리 날아 가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셔서 아예 홀빈으로 구매를 하신다. 어느 정도의 입자 수준으로 갈아야 좋은 맛이 난다는 것도 익히셨다. 게다가 스타벅스와 폴바셋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고 커피 맛도 구분하신다. 사실, 그 정도까지 익숙해 지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 예상보다 더 원두커피의 진짜 매력에 흠뻑 젖으신 것 같다.

매일 아침, 어머니와 아침식사를 하시고 직접 간 원두커피를 내려 드시는 게 일상이 되셨다는 아버지. 드시는 원두가 거의 떨어져서 어느 매장의 어떤 원두를 추가로 구매할지 고민하시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친 김에, 내가 즐겨 보는 커피 전문잡지 드리프트도 읽어 보시라고 권해드릴 참이다. 지금의 아버지라면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하실 내용으로 가득하니, 재밌게 보시리라.

기존에 해오던 습관의 담장을 넘어서서 좀 더 좋은 수준의 경험을 한다는 건 사람에게 큰 변화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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